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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칭의 대지, 공동의 몸

사라질-사라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통과했다. 묵묵히.
- 한강, 흩날린다, 흰, 100쪽
1.
현대사진의 흐름에서 자연을 주제로 한 풍경 사진은 흔하면서 흔하지 않다. 특히 미술로서의 사진은 인물, 사물, 건물, 자연을 막론하고 마치 하나의 상품이나 정물처럼 재현하는 사진적 태도를 현대사진의 미학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사진의 전술은 사진에게 요구되는 필연적인 소명, 즉 진실의 포착이라는 소명에서 벗어나 기술을 매개로한 시각과 재현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 열중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다. 최근에는 이미지가 생산되는 방식과 과정을 해체하거나 오작동 시킴으로써 실재와 가상, 진실과 거짓,현실과 허구를 뒤섞어 문화와 삶 사이의 관계가 어긋난 동시대의 부조리함을 극적으로 개념화한다. 따라서 오늘날 사진이란 존재는 기술과 예술 이전에 이미지로 환원된다. 다시 풍경이란 개념으로 되돌아가보자. 서구에서 풍경은 회화의 장르로 탄생된 개념이다. 하지만 풍경이 독립장르로 분리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왜냐하면 기독교 주의 관점에서 자연이 회화의 주인공이될 수는 없었기에 항상 주제의 배경으로만 활용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19세기가 되면서 갑자기 정형화된 풍경이 해체되고 작가들의 의식이 지배하는 새로운 풍경이 등장한다. 그것은 자연을 유형학적으로 재현하지 않고 화가 자신이 경험한 자연의 역동성, 계절과 기후를 생생하게 표현하면서부터 가능해졌다. 그런데 20세기가 되면서 갑작스레 풍경이 사라졌다. 전쟁과 혁명으로 점철된 20세기 초 유럽은 더 이상 낭만적으로 자연을 관조하거나 향유할 수 없었다. 자연과의 교감은 점점 더 현실에서 멀어졌고 “풍경 회화에 대한 그때가지의 기대를 거스르며, 우리가 ‘자연’이라 불러온 색칠된 풍경이 결국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1]그렇게 회화에서 자연의 모습은 사라지고 빈자리는 추상으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프랑스의 중국학 철학자 프랑수와 줄리앙은 서양의 풍경이 시각에만 집중된 점을 정확히 지적하면서 풍경은 곧 외관적인 것이란 관습으로 굳어버렸다고 해석한다. 더구나 서구문화가 워낙 시각성을 강조하다 보니 19세기에 잠시 찾아온 풍경의 회복마저도 곧바로 추상화를 맞이하고 말았다고 설명한다. “더군다나 풍경에 시각으로만 접근함으로 인해 우리는 다시 풍경의 추상화 현상을 맞게 된다. (청각, 후각과같은) 다른 감각들은 주변부로 밀려나고, 시각은 주변부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2]풍경 사진도 회화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외관만을 강조하는 전형이 두드러졌고, 앞서 서술했다시피개념적 사진의 등장에 의하여 자연마저도 사물화되는 경향은 더욱 견고해졌다. 시각은 대상을 정확하기 지시하지만 그로 인해 외관을 넘어 사물과 환경이 맺는 상호성, 보는 이와 대상 사이의 감각적 관계 등은 배제된다. 특히 언어학적 구조로 세계를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예술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면서 이른바 감각의 세계, 감각적인 것에 대한 충동과 요구가 최근 들어 부상하는 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2.
사실 한국 현대사진을 살펴보면 의외로 풍경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산악 지형이 워낙 많은 탓에 뿌리가 깊게 내린 독특한 산악문화의 영향도 적잖다. 도시 형성 과정에 있어서도 산세는 풀어야 할 고약한 문제이자, 동시에 낡은 관습에 의한 풍수지리나 폐쇄적인 계층문화를 공고하게 다지는 터가 되기도했다. 회화의 영역에서는 산을 주제로 한 풍경화 장르는 전통문화, 역사, 동양미학 그리고 현대의 하위문화가 혼합되어 제의적이거나 비유적인 성격으로 진화하면서 여전히 맥을 유지하는 중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목가적이고 제의적인 풍경화 장르는 전보다 많이 쇠락한 반면 현대 풍경화는 시각성이 더 극대화되거나풍경을 비평을 위한 수단이나 장치로 활용하는 측면이 더 강해진 것 같다. 특히 지난 십여 년 사이에 풍경은 마치 회화의 대안처럼 유행의 흐름을 탔다. 당시 풍경들은 도시재개발과 연결되어 있는데, 재개발이란 명목으로 자행되는 마을의 해체로 인한 심리적 공황, 기억의단절, 상실감으로 비롯된 현상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이같은 현상은 옛 정서가 남겨진 장소, 척박한 도시 환경에서 힘겹게 생존하는 이름 모를 식물들의 존재에 눈길을 주는 위안의 마음이 담으려 했다. 즉 개념적인 접근보다는 과도한 도시화의 반발작용으로 가까운 자연을 찾아간 작가들은 그곳에서 위로도 받지만 동시에 생태계 파괴와 같은 고도 문명의 이면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3.
고성이 자연을 찾아 떠난 것도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하여 지지난해 늦가을부터이듬해 늦겨울을 통과하면서 원주의 숲을 떠돌며 촬영을 진행했다. 토지문화관 레지던시에 입주하게 되면서 원주와 인연이 생겼고, 그 인연은 그곳의 숲으로 이어졌다. 운명을 믿는 작가의 성향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 같다. 짧게 야영을 하면서 풍경 속으로 스며드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아침에 명상을 하고 산책을 하면서 오롯이 자연을 느끼는 시간을 갖는다는 작가의 말도 기억난다. 고성은 자연에서 잃어버린 뭔가를 되찾기 위해서라거나 흔한 위로를 받기 위하여 그곳으로 다가간 것 만은 아닌 듯하다. 사실 자연을 대상으로 사진을 찍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2년에 촬영한 초기 풍경 사진 “매지”는 원주시 매지리의 이름 없는 야산에서 받은 자연과의 마주침이 담겨 있다. 몇 해를 지나서 다시 찾은 원주의 자연과의 시차는 거의 없다. 문명이 닿지 않는 자리는 저마다의 순환의 진리를 따른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속 마른 갈대들은 요란하게 흩어져 있다. 그 주변에 약간의 검은 재가 뿌려져 있다. 갈대의 뻣뻣한 질감, 검정 재와 탄내의 기운이 섞인 듯한 낮게 드리운 어두움. 사진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이른 아침인지, 땅거미가 지는 저녁인지를 판단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그의 사진 전반에서 발견되는 어스름한 분위기는 빛과 어둠의 절묘한 톤의 균형 덕분이다. 사진의 경우, 섬세하고 예리한 프린팅 기술이 없이는 만들어내기 어려운 톤일 것이다. 이번 전시 <그림자들 헤아리다 지문이거멓다>에서도 “매지”와 마찬가지로 어스름한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낸 정서가 사진을 압도한다. 익숙한 겨울 풍경의 전형은 아니다. 기개가 웅장한 산의 형상도 없고 만년설과 같은 자연의 권능함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사실 이런 유형의 풍경은 자연을 초자연적으로 재현한다. 프랑수아 줄리앙이 언급한 추상이 된 풍경에 대한 비판이 지적하는 지점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기념비적 풍경은 자연의 다양한 모습, 가능성과 잠재력, 친밀감과 낯섦, 포근함과 두려움의 모순적인 성질을 담아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연의 본질을 거세하여 인공적인 조각물처럼 제시할 뿐이다.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자연의 모습도 이러한 초자연적 이미지에 더 가깝지 않을까? 이렇듯 기념비라 부를 수 있는 풍경은 말 그대로 다가갈 수 없는 이미지로 정형화되곤 한다. 이에 반하여, 고성이포착한 자연의 모습은 사적의 차원에서 이뤄진다. 사적인 차원이란 작가와 자연이 매우 밀착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는 자연을 최대한 자신의 시선 안으로 끌어들인다. 간혹 원경의 산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 산조차도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오묘한 설렘을 선사한다.
4.
알다시피 겨울 숲에는 어둠이 유독 빨리 내려온다. 여름의 숲이 풍요로운 녹음을 비추는 빛과그림자의 대비로 인해 극적인 인상을 가진다면, 겨울의 숲은 건조한 대기와 낮은 채도로 이뤄진다. 고성은 이 삭막한 계절에 잔존하는 영감과 마법의 신비를 온몸으로 감각하기 시작한다.이 실체를 알 수 없는 존재들은 대개 몸의 변화를 통하여 더 강하게 감각된다. 숨길 수 없는 입김, 점점 굳어지는 몸, 손가락끝의 아릿함 같이 연약하지만 의식을 지배하는 감각의 자극에 우리는 더욱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추위로 둔해진 공기의 움직임은 자음으로만 만들어진 낱말의 음소처럼 삐걱거리고 어긋난다. 공기가 차면 찰수록우리의 몸은 부자연스러워진다. 이제부터는 내가 처한 환경이 나를 지배한다. 야생은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에 순응해야 한다고 알려준다. 이것이 바로 바슐라르가 말하는 ‘인간과 세계가 서로에게 몸을 여는 순간’일 것이다. 고성의 작업 방식도 바슐라르의 사유를 닮았다. 그는 자연을 재현하기보다 그 세계와 교감하는 상태를 포착하고자 한다. 형상으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자연을 구성하는 원소들, 물, 불, 흙, 공기, 그리고 생명의 기운을 사진에 담는다. 먼 발치에서 대자연의 웅장함을 재현하지 않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 그것의 생명력과 야생성을 앵글에 담아낸다. 그렇다고 그가 대자연 속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수행을 하는 구도자처럼 자연과 교감하기 위한 시도들이 그가 사진을 찍는 이유일 것이다. 사진을 보여주는 방식은 상당히 거리가 있지만 자연과의 교감과 대기적 상태를 포착한다는 측면에서는 로니 혼의 “당신은 나의 날씨” 와도 비교해볼 만하다.
5.
고성의 풍경은 무국적적이고 비인칭적이다. 그가 담아내는 건 특정 장소의 기억이나 지역의 경관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사진에는 기호나 상징이 들어올 틈이 없다. 대신이 낯설면서 낯설지 않은 풍경은 온갖 차이들, 분쟁들, 경계들을 넘은 가장 오래된 공동의 몸을 되찾는 의지를 요구한다. 그것은 긍정도 부정도, 옳고 그름도 따지지 않고 섭리에 따라 조건에 맞춰 끊임없이 균형을 맞추려 한다. 때론 격정적이고 때론 평온하게.
정현(미술비평, 인하대 교수)
[1] 프랑수아줄리앙, 『풍경에 대하여』, 아모르문디, 2016, 14쪽
[2] 위의책, 23쪽